세계 최장 새만금. 월령봉 산행
>> 새만금 개발의 역사새만금 방조제 사업이 1991년 11월 28일 착공한 이후 19년 만에, 새만금 개발계획이 확정된 지 21년 만에 드디어 준공되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따랐습니다.
처음 새만금 사업이 구상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30여 년 전인 1970년대 초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사업 배경은 식량난에 허덕였던 정부가 당시 안정적인 식량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정부는 1971년 옥구군과 충남 서천군을 연결하는 '옥서지구 농업개발계획'을 수립합니다.
1단계와 2단계로 구분된 이 계획에서 정부는 세계은행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해 1단계 사업인 논산과 금강지구 사업을 추진합니다. 그러나 김제와 부안, 옥구 지구를 묶은 제2단계 사업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추진되지 못했습니다.
1986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이 사업을 '김제지구 간척지 농업개발사업'으로 이름을 바꾸고 부안군 계화도와 옥구군 선연리를 연결하는 방조제 사업에 대해 본격 검토합니다. 김제 만경과 진봉, 광활, 죽산면 일대 관개, 배수를 개선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987년에는 전북 무주 출신의 황인성 농림수산부장관이 처음으로 '새만금 간척사업'이란 명칭을 공식 사용하고, 그 일대 바다를 막아 김제, 만경평야와 같은 옥토를 만들어 식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자는 구상을 내놓았습니다.
새만금 간척사업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당선된 후 1989년 들어서 이 사업은 본격화되기 시작했습니다. 1989년 ‘새만금종합개발사업 기본계획’이 발표됐고, 드디어 1991년 기공식 행사를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이 후 시련을 맞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새만금 사업이 탄력을 받을 것이란 기대와는 달리, 새만금 환경문제에 관한 민관공동조사가 수용됐고, 노무현 전 대통령 당시에는 환경․시민사회단체 반발로 기나 긴 소송에 휘말려야 했습니다.
2001년 환경운동연합의 헌법소원을 시작으로 계속된 새만금 관련 소송은 2006년 3월 대법원 확정판결로 정부측이 승소할 때까지 계속됐습니다. 드디어 노무현 전 대통령 임기 말기인 12월 새만금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새만금 사업은 다시 탄력을 받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의 인수위 시절 새만금을 동북아 경제중심지로 개발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이후 새만금 개발은 급물살을 타게 된 것입니다.
월령봉-대각산 산행 예정이 우천 관계로 단축산행으로 됨으로 곰소 젓갈 전문단지로 다녀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