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조직폭력배의 역사 ]
마루오까
김두한과 우미관 식구
김두한과 그의 참모 김영태
김두한의 오른팔격이었던 별명 종로꼬마 이상욱
한국에서 조직적인 폭력배의 태동은 자본주의의 맹아가 싹튼 구한말에 비롯됐다는 게 정설이다.
이권과 함께 시작된 주먹의 역사는 상업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는 말은 설득력이 있다.
한국의 주먹들은 과연 어떤 옷으로 갈아 입으며 변화해왔을까.
그들이 기생한 사회환경과 이권 추구 방법,
그리고 조직을 유지한 나름대로의 철학 등을 종합해볼 때
한국 주먹의 역사는 크게 4기로 구분할 수 있다
. 제1기는 일제치하와 광복 공간의 ‘낭만파 주먹시대’이며,
제2기는 자유당 정권 시절 정치권과 공생관계를 유지한 ‘정치깡패의 시대’로 나뉜다.
5·16으로 된서리를 맞은 주먹세계는 한동안 숨을 고르다
70년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눈부신 경제성장을 발판으로 먹을 ‘파이’가 한결 커지자
피비린내 나는 조직끼리의 전쟁을 통해
‘전국구 주먹시대’로 접어든 게 바로 제3기다.
제4기로 불리는 현재의 주먹세계는 음습한 ‘검은 옷’을 벗어던지고
합법적인 공간에서 활동하는 ‘기업가형 폭력배 시대’로 변신했다.
●한국 주먹패의 효시
흥선 대원군 이하응(1820 ~1898)
현대적 의미의 조직 폭력배의 시초는 과연 언제일까. 역사학자들중에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밑에서 불우한 생활을 하던
흥선대원군이 만든 사조직을
조직 폭력배의 효시로 보는 견해가 많다.
흥선대원군은 당시 불량배와 어울리며 안동김씨의 감시와 견제에서 벗어나는 연막전을 폈고,
자신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고종의 兒名)을 보좌에 앉힌 뒤 절대권력을 휘둘렀다.
흥선대원군은 이후 권력투쟁의 고비마다 이들을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달성하는 전위부대로 적극 활용했다.
이전에도 객주나 나루 주변에 상인들을 갈취해 돈을 뜯는 무리가 없지는 않았지만
폭력행사를 주업으로 삼지 않았다는 점에서 현대적 의미의 조직 폭력배라고 단정하기는 무리다.
●제1기 낭만파 주먹시대 : 3자 구도
폭력을 생업으로 삼는 한국 주먹의 본격적인 장은 1930년대에 열렸다.
피 끓는 젊은이들이 식민시대의 울분을 토해낼 길이 없어 폭력배로 전락했다는
일부의 해석은 사회과학적인 논리가 결여된 유치한 발상이다.
사회현상은 구조적인 틀 속에서 입체적으로 설명돼야 한다.
30년대는 일제의 식민지배가 공고해지는 시기로 토지수탈과 상업자본주의의 침투로
농업을 기반으로 한 봉건제 사회가 부분적으로 해체되는 변화를 겪는 시기다.
그 과정에서 생산수단을 박탈당한 농민들은 상대적으로 먹고 살 길이 나은 도시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이들 가운데 힘깨나 쓰는 젊은이들은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 ‘암흑세계’의 전면에 나서게 됐다.
당시 경성은 조선인이 주도하던 종로상권과 일본인이 밀집한 명동상권으로 나뉘어 있었다.
주먹패들은 상권에 기생해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당시 주먹세계도 자연스레 양분돼 있었다.
명동의 지존은 하야시로 알려진 한국인 선우영빈.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거물정치인이자 최대 야쿠자 조직인 ‘현량사’의 보스
도오야마 마쓰루(頭山滿)의 휘하에서 성장한 만큼
조선 내 야쿠자의 우두머리로 막강한 조직 장악력을 과시했다.
반면 종로의 주먹패는 명목상 ‘구마적’ 고희경이 오야붕의 위치에 있었지만
조직력과 자금력이 취약해 하야시처럼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종로를 장악한 주먹이 조선 최고의 오야붕으로 인정받던
당시 주먹판의 권력판도는 구마적을 비롯해 학생패를 이끈
보성전문 출신의 ‘신마적’ 엄동욱, ‘쌍칼’ 김기환 등이
형성한 삼자구도라는 분석이 타당하다.
엄동욱은 학생패라는 충성도 낮은 조직의 한계로 패거리의 전체적인 힘에서 다소 약했지만
뛰어난 싸움 실력으로 구마적의 반열에 올랐다.
김기환도 구마적의 하부조직에 편입돼 있었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조직력으로 구마적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세력으로 급성장했다.
왕십리의 김남산, 마포의 정춘식 등도 조직 편제상 ‘구마적’
휘하에 있었지만 자신들의 지역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주먹 계보로 활동했다.
보호비 명목으로 상인들에게 갈취한 일종의 세금이 이들의 주 수입원이었던 만큼
협객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게 객관적인 평가다.
●김두한의 천하통일
삼자구도를 형성하던 조선 주먹계가 1934년 김두한에게 평정됐다.
김두한의 당시 나이는 18세.
김기환이 구마적에게 패해 조직을 넘겨받은
김두한이 신마적과 구마적을 차례로 때려눕히고 주먹세계를 통일했다.
이후 조선의 주먹판도는 하야시와 김두한의 양자대결 구도로 전환하게 된다.
영화 ‘장군의 아들’이나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김두한의 항일의식을 부각하기 위해 하야시와 극단적인 대립관계로
당시의 상황을 묘사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둘은 갈등보다 동반자적인 관계로 각자의 수익구조를 유지했다.
김두한 역시 생존 당시 동아방송 대담프로그램인 ‘노변야화’에 출연해
“하야시패와 장충단에서 일전을 벌인 뒤 하야시를 형님으로 모시며 형제관계를 맺었다”고
두 사람 간의 공생관계를 시인하기도 했다. 주
먹패들의 징용을 피하기 위해 김두한이 창설한 ‘반도의용정신대’도
총독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하야시의 도움을 받았다.
●광복 공간의 암흑세계
광복 후 좌우의 이념대립 바람은 주먹세계에도 몰아쳤다.
우익 주먹들은 김두한이 선봉에 서 ‘민주청년동맹’을 이끌었고
이북 출신이 주축이 된 ‘서북청년단’이 뒤를 이었다.
좌익 주먹패는 김두한의 친구인
정진용(야인시대에는 정진영으로 나오지만 문헌상으로는 정진용이 올바른 표기)이 이끈
‘조선청년전위대’가 대표적이다.
좌익에 대한 김두한의 백색테러는 악명 높았다.
파업현장에서 무자비한 테러를 자행했고 정진용을 살해한 ‘시공관 사건’으로
김두한은 미군정청으로부터 사형을 언도받기도 했다.
주먹패들의 좌우대립은 권력과 손을 잡음으로써 활동 영역이 정치적 공간으로 확장되는 계기가 된다.
주먹세계의 경쟁도 외부 유입 세력의 가세로 한층 치열해졌다.
6·25가 터지고 이북 출신들이 서울로 몰려들었다.
광복 후 하야시패가 떠난 명동을 장악한 이화룡,
명동 동부의 중앙극장을 차지한 정팔 등이 대표적인 이북 출신 주먹패.
일제시대 중원을 떠돌던 시라소니 이성순도 광복 후 동향인 신의주 출신 정팔의 요청으로
‘중앙극장파’에 잠시 몸을 담았다.
낭만파 주먹들은 일제 식민지배와 광복 뒤 좌우이념대립, 그리고 전쟁이라는 혼란기를 겪었다.
생존을 위한 기생형 폭력 조직의 성격을 띤
제1기 주먹시대는 보호비 명목으로 상인들에게 자릿세를 뜯는 것을
주 수입원으로 삼아 폭력의 사회적 폐해는 상대적으로 미약했다.
조직 끼리의 대결도 흉기에 의존하기보다 맨손으로 치러 어떻게 보면 인간미마저 느껴진다.
매춘 아편 등 쉬운 수입이 보장된 반사회적인 행위를 자제하고
조직원 끼리의 의리를 중요시하는 등 주먹 철학도 엿보인 시기다.
이 때를 낭만파 주먹시대라 부르는 이유다.
●제2기 정치깡패의 시대
낭만파 주먹시대를 거친 한국 주먹들은 생활의 물적 토대를 확보한 뒤
본격적으로 몸집 불리기에 나선다.
시대적인 환경도 이들의 ‘몸집 불리기’에 튼실한 자양분을 공급했다.
6·25전쟁을 거치고 자유당 정권이 뿌리를 내리면서 정통성이 결여된 정치권이
주먹세계의 물리적 힘을 이용하기 위해 추파를 던졌다.
건달세계도 질적 변화를 겪으면서 이른바 주먹과 권력이
본격적으로 손을 잡는 ‘정치깡패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1954년 김두한의 정계입문으로 무주공산이 된 주먹계에
현대적 의미의 조직 개념을 도입한 이정재가 급부상했다.
동대문 상인조합 이사장이 된 이정재는 막강한 자금과 조직력을 앞세워
자유당 이기붕에게 접근해 정치권과 손을 잡는다.
57년 장충단 야당집회 방해사건 등을 주도하며 혁혁한 공을 세운
이정재는 자유당 이천 지구당위원장까지 역임하며 한국의 도야먀(頭山滿)를 꿈꿨지만
결국 5·16쿠데타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이정재의 동대문사단 휘하에는 자유당의 사주로 4·18 고대학생 습격사건을 주도한
유지광을 비롯해 ‘연예계의 대통령’으로 불리던 임화수와
‘시라소니’ 이성순에게 잔인한 린치를 가해
주먹생명을 끝낸 이석재 등이 포진해 있었다.
동대문사단은 본격적인 정치깡패의 시대를 열었지만
시라소니 린치 사건에서 보듯 ‘협객’이라고
자처하던 낭만파 주먹시대의 물을 흐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시기에 김두한으로부터 종로를 넘겨받은 심종현을 비롯해
광화문의 장영빈, 서대문의 최창수, 소공동의 홍영철 등이
나름의 주먹 계보를 이어왔지만 정치권과 결탁해
독주하던 동대문사단에는 견줄 수가 없었다.
정치권도 동대문사단의 바람막이 구실은 물론 적극적인 비호를 서슴지 않았다.
이정재가 가장 껄끄럽게 여기던 이화룡의 명동파를
‘충정로 도끼사건’을 빌미로 제거해주기도 했다.
정치깡패의 시대를 이끈 이정재는 느슨하던 주먹 조직을 기업형으로 새롭게 재편하고,
활동공간 역시 광역화함으로써 현대적 의미의 조직폭력배의 발판을 다졌다.
특히 충성도 높은 조직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고향인
이천 지역 출신을 대거 중앙으로 끌어들여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탄탄한 결속력을 과시했다.
1960년 4월 18일 고려대 단과대 학생회장단 주도로 열린 3·15부정선거 및 자유당 독재 규탄집회는 밤까지 가두행진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해산 과정에 정치 폭력배들이 급습해 학생 상당수가 다치고 현장은 아수라장이 됐다.폭력배들의 눈을 피해 어렵사리 찍은 이 사진이 19일 신문에 실림으로써 4·19혁명의 작은 도화선이 됐다.
3.15 부정선거와 관련된 혐의로 재판을 받는 신도환, 임화수, 유지광 피고인 - 1960년 7월 9일
4
월 혁명 뒤 집권 자유당의 하수인 노릇을 했던 정치 깡패들이 법정에 불려와 재판을 받았다 - 1960년 7월 16일
정치깡패사건 심리 광경
신도환, 임화수 등이 모두 거짓 진술을 한다고 비난하는 유지광 피고 - 1960년 7월 16일
법정에서 진술하는 신도환 피고 - 1960년 7월1 6일
첫 심판대에 출두하는 독재의 앞잡이 정치깡패 - 1960년 7월 6일
깡패들의 행렬. 이름표를 붙이고 시내를 일주했다 - 1961년 5월 21일
맨앞이 이정재
신도환 피고 - 1961년 8월 8일
1961년 1월19일 정치깡패 문장주, 주요한, 김태련, 김성종, 강승일이 공판장에서 재판을 받고있다.
1961년 8월 고려대생 피습사건 구형공판에서 임화수는 사형을, 유지광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고려대생 피습사건 용의자인 신도환, 임화수, 유지광이 현장검증을 위해 이동하고 있다 - 1961년 8월
고려대생 피습사건의 용의자인 신도환, 임화수, 유지광이 현장검증을 위해 이동하고 있다 - 1961년 8월
정치깡패 문장주, 주요한, 김태련, 김성종, 강승일이
공판장에서 재판을 받고있다 - 1961년
고대생피습사건의 피고인 17명에 대한
판결공판이 혁명재판 1호법정에서 개정되었다.
이 공판에서 임화수 사형, 신도환 무기징역, 유지광 12년형을 언도받았다.
사진 왼쪽부터 신도환, 임화수, 유지광 - 1961년 8월25일
전 반공청년단장실에서의 좌측이 임화수
가운데 신도환, 우측 뒤에 유지광 피고 정치깡패사건 심리 광경 - 1961년 8월 8일
●제3기 전국구 시대
5·16쿠데타 이후 깡패 소탕령으로 숨을 죽이던 주먹세계는
63년 민정 이양 이후 조심스럽게 기지개를 켰다.
지리멸렬하던 주먹계를 잠시나마 통일한 사람이 바로
‘신상사’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신상현이다.
그는 이화룡이 이끌던 명동파의 행동대장 출신으로 과도기에 ‘밤의 황제’로 등극했다.
‘신상사파’의 시대는 오래 가지 못했다.
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눈부신 경제성장은 주먹세계의 변화를 요구했다.
경제개발로 인한 급속한 도시화에 따라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호남지역에서 무작정 서울로 온 청년들은 손쉽게 ‘
검은 세계’에 편입돼 주먹계의 ‘태풍의 핵’으로 등장했다.
오종철과 박종석(일명 번개)이 양분하던 ‘범호남파’는
무교동 유흥가를 발판으로 세력을 키운 뒤 당시 패권세력이던
‘신상사파’와 일촉즉발의 대결구도로 치닫는다.
범호남파는 경제성장에서 소외된 상대적인 박탈감에다
사회구조적 요인에 의해 갑작스레 주먹세계로 편입됨에 따라
이전과 달리 잔인한 폭력성을 드러냈다.
범호남파는 1975년 1월 2일 주류 공급권과 관내 유흥업소 상납금을 둘러싸고
명동의 사보이호텔에서 신년회를 열던 신상사파를 급습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사보이호텔 기습 사건을 통해 ‘오종철파’의 행동대장이었던
조양은이 급부상했고, 범호남파도 내부 분열을 겪는다.
내부적으로 수세에 몰린 ‘박종석파’의 행동대장
김태촌이 1976년 3월 무교동 엠파이어호텔 후문 주차장에서
범호남파의 실질적인 보스 오종철을 칼로 난자해 불구로 만들었다.
이후 조양은과 김태촌은 3년간 쫓고 쫓기는 혈투를 벌였다.
이 시기에 오기준, 김태촌이 중심이 된 ‘서방파’와
이동재를 두목으로 한 광주 ‘OB파’가
급속히 세력을 키워 당시 패권세력이던 ‘양은이파’와 함께
‘3대 패밀리’를 형성했다.
전국적으로 통하는 주먹이라는 의미의 ‘전국구 주먹시대’는
이러한 ‘3대 패밀리’를 비롯해 부산의 칠성파(두목 이강환),
대전의 옥태파(두목 김옥태, 2001년 사망),
대구 동성로파(두목 오대원), 수원파(두목 최창조),
이리 배차장파(두목 김항락) 등이 이끌었다.
이즈음에 한국 주먹사는 잔인한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다.
‘전통 주먹의 시대’는 가고 ‘칼잡이의 시대’가 왔음을 알렸고,
선·후배간의 위계질서도 생명력을 잃었다.
주먹세계를 부르는 호칭이 ‘조폭(조직폭력배)’으로 바뀐 것도 바로 이 시기다.
이권추구 방식과 활동공간도 엄청나게 바뀌었다.
활동공간은 상권 중심에서 대형 유흥업소 중심으로 바뀌어
주먹들의 ‘강남시대’가 열렸다.
또한 부를 축적하는 방식도 시대에 걸맞게 다양해졌다.
채권·채무관계 주주총회 등에도 조폭들이 개입해
‘해결사’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주류 도매업은 물론 공사 입찰 건축자재 공급권에도 손을 뻗쳤다.
검찰도 80년대까지 진행된 이 시기를 폭력배들의 황금기로 보고 있다.
조폭과 정치는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인지라 정치와의 연계는 이 시기에도 계속되었다.
87년 호헌철폐, 직선개헌을 내세운 김대중, 김영삼씨가
통일민주당 창당을 시작하는데 지구당 창당때 주먹패들이 방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일명‘용팔이 사건’으로, 이 사건은 후에 5공 핵심인사 장세동(당시 안기부장)씨가
계획해 일어난 것으로 밝혀졌다.
이 밖에 94년 슬롯머신사건, 98년 한나라당 서울역집회 방해사건도
조직폭력배가 일으킨 사건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 제4기 소규모 벤처창업형태의‘조폭’
이제 새로운 시기에 맞춰 젊은 세대들이 조직폭력배로 탄생하고 있다.
소규모로 구성된 군소 조폭들이
대도시 유흥가를 중심으로 기지개를 펴고 있다.
과거 거대‘패밀리’형태로 운영되던 폭력조직이 벤처기업 창업형태와 같이
소규모 조직으로 분화되고 있는 형태이다.
이는 계보를 거느린 대조직은 사법기관에 노출되기가 쉽고
조직을 이끌 자금력이 부족해지기 때문이다.
또 범죄단체를 구성한 두목급에 대해서는 최고 사형까지
]처벌할 수 있는 중형이 선고되기 때문에 이 같은 경향은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최근 학교폭력사태에서 보듯,
10대들의 조폭 가담은 일선 학교의 불량서클을 모태로 하고 있다.
소위 일진으로 불리우는 학생들은 학교내에서
동료학생을 상대로 금품갈취와 폭력을 행사하다
퇴학이나 정학 등을 통해 사회의 폭력조직에 진출하게 된다.
이들은 각 조직의 행동대원으로 시작하여
학교후배를 조직에 끌어들이게 된다.
이후 일정한 노하우가 쌓이면
이들은 조직에서 뛰쳐나가 새로운 조직을 만들게 된다.
최근에는 몇 명만 모이면 조직을 만들고 있다.
특히 10대들이 활개를 치면서 점차 흉폭해지고 있다.
그도 그럴것이 인성교육을 받아야 할 10대에
힘에 의한 논리를 배우게 되면,
더 폭력적이고 잔인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최근 조폭은 주먹 계보 대신 돈에 따라 이합집산하고 있다.
한때 유행하는 조폭영화에 등장하는 '
조폭 의리'는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2011년 말까지 경찰이 감시하는 조직폭력배는 전국적으로 220개 조직, 5451명에 이르고 있다.
경찰 관리 대상 조폭은 조직 체계와 강령이 있고
자금 능력이 있어 활동이 왕성하다고 판단된 조폭으로,
매년 초 경찰이 선정해 감시하고 있다.
이들보다 더 골치 아픈 존재가 명확한 계보도 없고
두목도 불분명한 비(非)관리 대상 조폭이다.
시민들이 느끼는 체감 치안에서는 이들의 준동이 더 문제가 되고 있다.
이들은 상하 관계보다는 돈과 이득에 따라 소규모로 움직여 단속하기도 어렵다.
몇년전 10월 21일 인천 장례식장 앞에서 난투극을 벌인
인천 '신간석파'와 '크라운파'는 소규모 조직이다.
이러한 소규모 조폭은 이권에 따라 수시로 뭉쳤다 흩어졌다 해 관리가 어렵다.
인천 조폭 패싸움은 상당히 이례적인일로
최근 조폭은 예전처럼 수백명씩 싸운다거나 하지 않고,
지능적이고 불법적 방법으로 돈을 벌고 있기 때문이다.
조폭 조직의 양상은 1990년 노태우 정부의 '범죄와 전쟁' 때 크게 바뀌었다.
이전에는 피 튀기는 '주먹 전쟁'을 통해 세력을 넓혀야 했고,
그러기 위해 대규모 조직이 필요했다.
그러나 '범죄와 전쟁'으로 대부분 조직이 와해되면서
합법을 위장한 돈벌이에 눈을 돌렸습니다.
조폭들은 성인오락실, 건설업, 사채, 심지어 벤처기업 등
돈이 몰리는 곳으로 진출했다.
코스닥 상장 기업을 인수해 회사 자금을 빼돌리거나
주가조작에 관여하기도 하는등 무조건 돈만 쫓는 현재 조폭은 진화하고 있다.
◆ 불의와 싸우던 1세대 주먹의 정의로움을 기억하길
조직폭력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범죄행위이다.
앞으로도 더 진화하고 지능화, 합법화 할 것이다.
쉽게 돈 벌수 있는 기업형태의 조직폭력배는 1
0대들이 우상화하고 흡수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하지만 자라나는 청소년이 조폭영화,
조폭드라마를 보며 조폭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학교에서 힘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통쾌함을 느끼는 순간,
우리사회는 잘못된 길을 걷는 것이다.
민주주의에 반하는‘힘에 의한 지배’원칙을 쉽게 익히고
자라나는 우리의 10대들을 바라보며,
일제식민지의 억압 속에 민중을 지키고자 노력했던
1세대‘주먹’들을 돌아보라고 말하고 싶다.
결코 주먹이 먼저인 사회는 옳지 않지만,
어쩔수 없이 사용해야 한다면,
약자를 괴롭히는 조폭보다는 불의를 보고 참지못하는 주먹이 되었으면 한다.
2012년 대한민국은 좀 더 정의로운 사회가 되길 희망한다.
염 건 웅(廉建雄) (NSP통신 칼럼리스트)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동국대학교 대학원 경찰행정학과 졸업,
공안사법연구소 수석연구위원, 한민대학교 경찰행정학과 초빙교수,
국회 환경노동위원장 정책비서관, 한나라당 6.2지방선거 정책특보,
한나라당 10.26재선거 공보특보를 거처 현재 한국범죄학회 이사,
경찰무술신문 논설위원, 한양대학교 경찰행정학과 주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 동대문사단 수장 낙화유수 “김태련”
‘낙화유수 별세 1주기’, “형님은 가셨어도 존경심은 그대로”
이득을 위해 인륜마저 저버리는 요즘 세태.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은 옛말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이른바 ‘주먹 세계’에선 더더욱 그렇다.
이권을 앞에 두고는 ‘형님’도 더 이상 형님이 아닌 세상이다.
그러나 ‘협객’으로 불렸던 1세대 주먹 세계는 달랐다.
계보를 중심으로 낭만과 의리가 바탕에 깔려 있다.
서로를 존중하고 친형제처럼 아끼면서 패밀리를 형성했다.
이런 맥락에서 이미 세월의 무대 뒤로 영면한 1세대 주먹 중
후배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인물은 바로 ‘낙화유수 김태련’이다.
전국구의 중심인 ‘동대문사단’을 이끌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피의 전쟁’보다는 후배들의 일자리 창출에 매진했고
사회에 봉사하는 삶을 살다 갔다.
<시사신문>은 2006년 11월 별세한
낙화유수 김태련 1주기를 맞아 그의 삶을 되짚어 봤다.
동대문사단 마지막 협객, 그가 살다간 삶의 흔적?
사회봉사 활동하며 후배들 땀 흘려 일하도록 계도
사실 주먹 세계에 대한 세인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최근만 하더라도 사회악(惡)의 중심에서 각종 불법행위를 일삼는
조직폭력배들의 모습이 잇따라 매스컴을 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1세대 계보를 잇는 전국구 주먹들에게선 흔히 찾아 볼 수 없는 일이다.
물론 1950~60년대 정권의 하수인으로,
밤거리 유흥가 이권 다툼으로 비난을 받았던 적이 없었던 건 아니다.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를 ‘협객’으로
바꿔 놓은 결정적인 인물이 낙화유수 김태련이다.
‘낭만파 협객’의 삶
낙화유수 김태련은 지난 2006년 11월2일 75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언론에서도 그의 소식을 ‘낭만파 주먹’ 또는 ‘마지막 협객’이란
수식어와 함께 비중 있게 다뤘다.
요즘 말하는 조폭과 그가 차별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낙화유수 김태련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는 1950년대 최고의 주먹이던 동대문사단 이정재의 사돈이자
후계자인 유지광 계보의 좌장으로 주먹계에 이름을 알렸다.
175cm의 1백kg에 육박하는, 1950년대 당시로는 훤칠한 체구의 ‘원펀치’로 통했다.
서울대 상대(52학번)를 나온 탓에
‘학구파 주먹’으로도 유명세를 탔다.
낙화유수란 별칭은 서울대 상대 시절 유유낙락하게 산다고 해서
여학생들이 붙여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먹계에서 이름을 날릴 때는
‘동대문사단 돌격대장’으로도 명성이 자자했다.
그런 그는 1951년 주먹계에 뛰어들어
1962년 이정재가 군사혁명 정권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후계자인 유지광 마저 정치깡패 혐의로 주먹계를 떠나면서
‘동대문사단’을 이끈 실질적인 보스가 됐다.
이후 주먹계에서 은퇴해 대한연합상사 등
경호회사를 운영하며 사업가로 일생을 보냈다.
주먹계 한 원로는 “큰형님은 약자 위에 군림하지 않았으며,
주먹으로 일 대 일 대결을 통해
결과에 승복하는 사나이다운 면모가 높았다”면서
“법보다는 주먹이 앞섰던 시대적 배경에서 주먹을 쥐었지만
자신의 사리사욕에 주먹을 쓰는 일이 결코 없었다”고 말했다.
이런 그가 후배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는 주먹계 은퇴 이후에도 한결같이 후배들을 자신의 가족처럼 대했다.
밤거리를 헤매는 비뚤어진 후배들을 훈계했고,
지인들을 통해 취직할 수 있도록 도왔다.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후배들을
건물관리나 경비원으로 취직시킨 일화는 여전히 주먹계에 회자된다.
‘사랑·나눔’ 실천 한다.
더구나 그는 사회봉사 활동에 앞장섰다.
16년 동안이나 학원폭력근절을 위해 헌신했고,
소년소녀가장 등 불우한 이웃을 돕는데 앞장섰다.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봉사 활동에 사용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의 뒤를 이어 동대문사단 명맥을 잇고 있는
대한연합상사 조병용 회장은
“큰형님의 유지를 받들어 아우들과 함께 사회에 보탬이 되는 삶을 살겠다”면서
“야인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그릇된 후배들을 바로 잡는 노력을 계속했고,
고아원, 양로원, 교도소 등을 찾아다니면서 봉사의 삶을 살다 가신
큰형님의 뜻이야말로 후배들이 당연히 본받아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한편 지난 2007년 11월2일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인근 그의 묘소에서는
‘낙화유수 별세 1주기’를 맞아 조병용 회장을 비롯해
자유당 주먹왕 이정재 비서실장 출신 이수학 등
동대문사단 계보 중심 인물들이 모두 모여 고인을 추모했다.
또 전국에서 명성이 자자한 주먹계 원로 및 현역들도 대거 참석해 모임을 갖고
‘큰형님’의 ‘사랑·나눔·실천’의 뜻을 받들자는 의견을 모았다.
낙화유수 ‘1년간 시묘살이’한 조병용 대한연합상사 회장
“형님 유지 받들어 사회에 보탬 되겠다”
낙화유수 김태련을 30년 가까이 보좌한 탓에 그의 후계자로 불리는
조병용 대한연합상사 회장이 지난 1년 동안
‘현대판 시묘살이’를 한 것으로 알려져 주먹계 선후배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살아 있는 ‘형님’도 배신하는 요즘 세태에 하물며
고인이 된 형님의 묘소를 1년 동안 잊지 않고 돌본다는 게 쉽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주먹계 원로 등에 따르면 조 회장은 1년 동안
매주 월요일이면 김태련의 묘소를 찾아 시묘살이를 했다.
묘소 옆에 움막을 지어 고인을 추모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매주 월요일을 ‘형님 묘소 찾는 날’로 정해 실천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최근 1주기 추모행사를 준비하면서 후배들의 입을 통해 주먹계에 알려졌다.
비단 조 회장이 후배들에게 존경받는 이유가 시묘살이 때문만은 아니다.
조 회장이 김태련의 생전 유지를 받들어 이를 실천하는 귀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례로, 조 회장은 후배들이 땀 흘려 착실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취직을 시켜주고,
‘나눔은 말로만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서
그동안 고아원이나 양로원 등을 빼먹지 않고 지속적으로 방문했다.
낙화유수 1주기 추모행사장에서 기자와 만난 조 회장은
“건달은 자기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면서
“형님의 유지를 받들어 후배들을 좋은 길로 이끌고,
사회에 보탬이 되는 삶을 살아가도록 계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청소년들이 드라마나 영화 등을 통해 건달을 동경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을 명심했으면 좋겠다”고
충고를 잊지 않았다.
학원폭력근절운동은 고인이 생전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했던 사회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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