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두면 좋을듯

짚풀 문화

진주영심 2011. 6. 5. 18:59

멍석

김종태


그 흔한 짚
꼼꼼히도 꼬고 결어
한 올 한 올 한마당 엮었다

꾸밈도 없이 우직하지만
거칠어도 어머니 품
볼품 없어도 쓰임새 많다

잔칫집 황토마당 주르르 펼쳐
너나 없이 퍼질러앉아
어우러지게 한바탕 펼친다

베등걸 잠방이에 방석을 찾으랴
오뉴월 흘린 땀
딩굴딩굴 멍석 위에 널브러져
오금 펴고 사추리도 말려 본다

없는 집에서는 장판도 되고
에미 자식 돌보듯
나락도 널어 말리고
못된 놈 걸리면 둘둘둘 말아
신나게 두들겨 패기도 한다

거 참 신통도 하다
펼치면 한마당 가득
거두면 헛간 한 귀퉁이


밤이나 농한기 때면 농사꾼들은 사랑에 모여 엉덩이를 들썩이며 거미가 거미줄을 뽑듯 사타구니 사이에서 사래사래 긴 새끼를 꼬았다. 짚은 우리 겨레와 아주 가까운 사이이다. 우리는 삼신짚 위에서 태어나 초가집에 살면서 벼농사를 짓고 짚으로 새끼 꼬고 멍석을 짜면서 살다가 가난하게 죽으면 거적에 둘둘 말려 초분으로 돌아가야 하는 지푸라기 같은 힘없는 존재였다.

짚:
백성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농부의 공예품은 짚문화에 있었다. 짚은 우리 조상들과 아주 가까웠다. 지푸라기 같은 백성들은 짚으로 농사에 쓰이는 여러 가지의 농구나 살림살이를 손수 만들어 썼다.
짚에는 볏짚, 밀짚, 보릿짚, 좃짚이 있으나 볏짚이 가장 널리 쓰였다. 볏짚은 땔감, 여물, 퇴비, 공예품화장실 화장지 대용으로 쓰였다. 볏짚은 재질이 부드럽고 탄력이 있는데다 통풍성과 조습성이 뛰어나 예부터 곡식 담는 그릇을 많이 만들었다. 짚은 속이 비어있어 완충역할을 하고 공기를 품어 보온작용을 하기 때문에 깰개용으로 쓰였다.

짚추리기:
공예품으로 쓰일 때 볏짚은 짚추리기를 한다. 짚추리기는 수냉이쪽(벼 위쪽)을 움켜쥐고 다섯 손가락으로 빗질을 하듯 훑어내려 총대를 벗기는 것을 말한다. 볏짚은 밑동인 짚똥구녕, 벼이삭이 나온 가운데 줄기인 매답, 이삭이 달렸던 줄기인 새꽤기, 겉껍질인 총대 등의 부분명칭이 있다. 이렇게 짚을 추린 다음 새끼를 꼬고 다른 공예품을 만든다.

새끼꼬기:
새끼에는 오른새끼와 왼새끼가 있다. 오른새끼는 오른손을 밑으로(바깥쪽) 내리며 꼬는 새끼이고 왼새끼는 왼손을 밑으로 내리며 꼬는 새끼이다. 왼새끼는 악귀를 쫓는 힘이 있어 금줄을 치는 곳에 썼고 보통은 오른새끼를 썼다. 금줄은 부정한 것의 접근이나 침범을 막기 위해 문이나 길 또는 신성한 것에 두르는 새끼이다. 아이를 낳은 집이나 동제 때는 금줄을 쳤다. 서낭당같이 신성한 곳은 새끼로 금줄을 쳐 잡귀를 쫓았다. 무당이 강신제를 할 때 쓰는 신구들도 새끼줄이 많이 쓰인다. 장독 언저리에도 새끼를 둘러 장맛을 지켰다.

새끼의 철학:
새끼는 매우 철학적이다. 우선 낱낱의 볏짚은 매우 약하지만 여러 개가 모여 꼬아지면 매우 힘이 있는 끈이 된다. 새끼가 꼬여서 쉬 풀어지지 않는 원리는 두 쪽의 짚들이 서로 같은 방향으로 자체가 꼬여 있기 때문이다. 새끼를 꼬면 원래 짚들의 길이의 합보다 짧아진다. 짚이 겹쳐 들어가는 이유도 있지만 꼬이면서 연입율만큼 짧아지기 때문이다. 서로 꼬이고 짧아지고 맞물리기 때문에 튼튼한 새끼가 되는 것이다. 두레를 하는 이치와 같다. 우리에게는 새끼같이 위대함이 있었다.


공예품의 재료:
짚은 새끼로 꼬이고 새끼와 짚이 어우러져 그 많은 짚공예품이 만들어진다. 새끼와 짚은 짚공예품의 기초골격인 것이다. 깔따리, 싸리, 버들가지, 댕댕이덩굴, 개나리, 겨릅대, 인동덩굴 등 다양한 풀을 이용하여 채반 동고리 바구니 등 숱한 용구들을 만들었다. 뺑대쑥으로 발을 만들었고 왕골, 잘포, 줄, 띠로 여러 가지 자리를 만들었다. 갈대로는 삿자리, 노화비, 화승을 만들었고 비사리로는 각종 무늬를 곱게 새겼다. 칡멀개덤불이나 솔새뿌리로는 솥솔을 만들었고 댑싸리 수수 싸리로는 비짜루를 만들었다. 부들이나 띠로는 도롱이와 자리를 만들었다. 억새로는 지붕을 이었고 청올치로는 갈포를 짰고 짚신을 삼았다.

공예품의 종류:
멍석: 짚으로 만드는 것 중 제일 크고 신기한 것은 멍석이었다. 멍석은 아무 곳에나 펴기만 하면 앉고 뛰고 눕고 놀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멍석을 깔고 차일을 치면 초례상도 차리고 굿판도 벌이고 잔칫상도 펼쳤다. 멍석은 부숭부숭하여 곡식을 말리는 데는 그만이었다. 흙방바닥 위에 깔고 자기도 했다. 색깔있는 헝겊이나 비사리로 글자도 넣고 무늬도 새겼다.


집집마다 몇 닢씩 마련하였다. 둘둘 말아 광 한구석에 세워놓거나 끈으로 감아 처마 벽에 걸쳐 보관하였다. 잔손질이 많이 가서 한 닢을 짜려면 이레 정도는 걸렸다. 쓰다가 해진 곳은 짜깁기하듯 기워서 썼다. 멍석은 새끼로 날을 삼고 짚으로 씨를 만들어 짰다. 추석이면 멍석을 덮어쓰고 소놀이를 하였고 마을에서 나쁜 짓을 한 사람은 멍석에 말아 때리는 멍석말이도 했다.

짚신: 짚신은 짚을 이용한 공예품 중 가장 작고 정교한 것이다. 특히 많이 신었던 네날짚신은 새끼 네 줄로 날을 삼고 짚으로 씨를 감으며 삼았다. 짚신은 사람만 신은 게 아니고 소에게도 신겼다.
아궁이에 넣으면 한 줌 재밖에 되지 않는 짚신에도 조상들은 온갖 정성을 들여 최고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냈다. 처음에는 네날짚신을 삼더니 왕골, 부들을 섞어 삼았고 나중에는 삼과 종이를 섞어 만든 여섯 날의 미투리를 삼았다.

깔개류: 맷방석은 동그랗고 언저리가 다소 높아 가운데 맷돌을 안치는 멍석이었다. 멍석 중 커다랗고 둥글게 만든 것은 도래방석이라고 했다. 주저리나 벌멍덕은 짚으로 대충 엮어 만든 벌통 뚜껑이었고 두투레방석은 짚으로 둥글게 돌아가며 엮은 것으로 땅에 묻는 김칫독의 뚜겅으로 쓰였다. 깔방석은 부엌일을 할 때 깔고 앉는 용도였다.

용기류: 둥구미는 멱둥구미로서 둥글고 언저리가 높고 곡식을 담는 용도이다. 멱서리는 벼 한 섬이 들어가도록 만든 커다란 용구였다. 짚으로 만든 짚독. 종자를 보관하는 종다래끼는 작지만 꼼꼼하고 질기게 만들었고 씨뿌리는 종다래끼는 허리에 차게 끈이 달렸다. 섬은 커다란 가마니로 가마니보다 용량이 크고 거칠었다. 가마니는 일제시대부터 만들었고 열말들이이다. 가는 새끼로 날을 심고 짚을 씨로 넣어 짰다. 씨오쟁이는 섬 모양으로 아주 작게 만든 씨앗보관용 용구였다. '씨오쟁이'는 씨앗을 보관하는 그릇이다. 짚으로 만들면 통풍도 잘되고 방습이 되므로 씨앗이 상할 염려가 없다. 쥐를 피하고 통풍을 하기 위해 끈을 달아 벽에 거는 형태가 많다. 씨오쟁이는 과거 농경시대에 생명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굶어죽어도 씨오쟁이는 베고 죽어라', '7년 가뭄에도 씨오쟁이는 어디에서든 나온다'는 말은 다음해 농사를 짓기 위한 씨앗을 얼마만큼 소중히 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망태는 새끼로 떴고 연장을 넣어두거나 땔나무를 나르거나 물건을 담는 그릇이었다.

기타공예품: 또아리는 물건을 머리에 일 때 머리를 보호하고 바닥을 판판하게 하기 위한 용도였다.


삼태기는 재나 두엄을 짧은 거리를 나를 때 쓰는 물건이었다. 또 짚으로는 비가 올 때 우의처럼 둘러쓰는 도롱이를 만들었다. 이밖에도 닭이 들어가 알을 낳거나 품는 닭둥우리, 낫을 꽂는 낫꽂이, 마소 등에 얹는 덤치, 비바람을 막아주는 떠날래, 가장 거칠고 성기게 짠 거적, 지게에 얹어 물건을 나르는 바소쿠리, 초가지붕의 용마름 이엉 등 숱하게 많은 생활용품과 농기구가 농부의 손을 거쳐 탄생되고 닳아져 갔다.

기술전수:
짚풀로 만드는 이런 물건들은 수명이 짧았다. 짚신 같은 것은 이삼 일, 어떤 것은 서너 달, 기껏 길어야 몇 년이면 수명이 다했다. 그래도 농민들은 정성을 다하고 재주를 부려 아름다움과 실용적인 것들을 만들어 냈다. 농사일이 끝나면 호롱불을 켜 놓고 여럿이 둘러앉아 어깨너머로 배우고 익혔다. 그랬기에 농사꾼이면 누구나 멍석, 짚신, 둥구미 등을 못 만드는 사람이 없었다. 또 이런 물건들은 내다 파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자신의 집안 일이나 농사일에 필요하여 자신이 직접 만들어 쓰는 것이어서 장이가 별도로 없었고 만든 사람의 이름이 전해지지도 않았다.
기술에 얽매이지도 형식에 구애를 받지도 않는 이런 짚풀공예는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우리 조상의 슬기와 얼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소중한 유물인 것이다
다행히 요즘들어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폐교를 마을의 교육․문화 중심지로 삼아 주민 스스로 전통문화를 잇고 화합의 장을 위해 축제를 마련하고 짚풀공예등을 전시하고 체험관을 운영하며 기술을 전수하고 학생과 젊은이들에게 농촌문화를 접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결론:
우리 겨레는 자연과 어우러지면서 자연을 이용하였다.
산과 들에 나는 섬유질이 있는 어떤 풀로도 만지작거리면 훌륭한 그릇과 도구들을 만들었다. 우리 겨레에게 풀은 식량이고 약이고 퇴비이고 반찬이고 공예재료였다. 산과 들의 풀과 짚, 그것들을 이용한 풀 같고 지푸라기 같던 백성들, 그들이 만들어 냈던 소박하고 정갈하고 맵시 좋은 공예품들, 이들은 지금 쏜살같이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현대의 생활은 시멘트와 플라스틱과 전기를 빼면 불가능하다. 모두 광물질이며 남의 힘을 빌려쓰는 것이다. 자연을 정복한 것들이다. 모두 사서 쓴다. 편리하고 손쉬운 것만 추구한다. 서로 어울리는 일이 없고 저 혼자 산다. 옛것은 비능률, 불합리, 비위생, 비생산이란 굴레를 씌워 모두 없애려고 한다. 우리의 것을 갈고 닦고 빛내고 전승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제 농촌에서조차 사라져가는 우리의 옛 숨결. 수천 년 이어온 그 작은 민속 공예품 하나 널리 세계에 알리기는커녕 맥을 이어가지 못하고 죽여버리는 정책과 발전이 과연 민족에게 가치있는 일인가 되새겨야 할 때이다. 우리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 우리가 아끼고 가치를 심어주고 계승 발전시킬 때 외국에서도 관심을 가질 수 있다.


우리의 짚문화 풀문화 나아가 농촌문화를 우리가 되살려야 한다. 도시의 많은 노령인구를 활용하여 우리의 산과 들에 나는 짚과 풀을 이용한 공예품을 개발하여 많이 애용하고, 널리 세계에 알리고 관광상품화하여 후손과 세계에 그 손재주와 미적 아름다움을 남기는 일은 아주 손쉽고 시급하고 훌륭한 정책이 아닐 수 없다.

짚풀생활사박불관:
인병선 씨는 「풀문화」「짚문화」라는 책에서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발굴하고 기록하면서 사라져가는 이들과 함께 국민들에게서 사라져가는 짚․풀의 마음을 안타까와하고 있다.
짚풀생활사박물관은 1993년 문화관광부에 등록하고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에서 운영하다가 2001년 현재의 종로구 명륜동으로 이전하였다. 설립자는 짚풀문화 연구에 평생을 바친 인병선 관장이며, 짚풀 특히 볏짚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설립한 박물관으로는 세계에 유일하다. 짚풀생활사박물관은 병설기관으로 (사)짚풀문화연구회가 있고, 현재 짚풀 관련 민속자료 3,500 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