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시절

컬러로보는 그때 그시절...

진주영심 2012. 2. 23. 13:15

이사진은 인터넷상에 떠도는 사진으로  작가는 주한미군으로 근무하였던 것같습니다.

사진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제가 나름대로 옛기억을 더듬으며 설명을 달아보았는데

추측으로 설명을 한것이므로 정확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해 겨울.....추위가 가라앉아가는 봄날 경기도 어느 마을 풍경이다.

앞에 보이는 지프는 이 사진의 작가인 주한 미군이 타고 다닌 차량 같으며 촬영자가 근무하던 근무지가

안양 혹은 오산 근교였던것 같다(아래 사진에 "안양영업소"란 글이 나오는것으로 짐작하건데 

안양은 광교산 미군 통신대가 있으며 수원비행장에 주둔하는 미군들과 오산은 미군 비행장주변의

쑥고개라불리는 유명한 기지촌이 있기 때문이다.)

 


겨우 2차선 아스팔트 포장흉내만 내었던 당시의 국도 풍경이다. 

(60년대 후반 국도는  도시근처에만 겨우 2차선포장이 되어 있고 나머지는 비포장길이 대부분이었다.)

 


도로주변의 풍경만큼이나 고달프던 우리네 삶이 이어지던 60년대 후반 어느날 아침 출근 풍경일거다..

 

 


어김 없이 봄은 찾아와 우공과 농부는 밭을 갈고...

 


논도 메고..(옆의 논에는 모내기가 끝나가는 모습이라 소를 이용해 논을 갈고 있는 농부의 모습이 바빠보인다.)

 


 촌로의 모습

 


개구장이들...(볼거리가 별로 없던 시절의 개구장이들에겐 카메라를 들이대는 이방인이 구경거리였을거다.)

 


지금 이 아이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가족이 한여름 유원지 나들이를 나온모습같다.(요즘같으면 표창받을 가족 구성원이며, 벌거숭이의 모습이 귀엽다.)




동네를 찾아온 자동차와 카메라를 들이대는 이방인이 마냥신기한 어린이들의 표정...

 

 

 

유원지 입구에서 데이트를 하던 남녀가 과일을 사고 있는 모습같다.(이 당시는 계절에 맞추어 상춘인파가 이동하던 지역들이

거의 정해져 있었다. 봄에는 창경원 �꽃놀이나  딸기,복숭아밭 여름엔 포도밭 가을엔 배밭 등으로)

 


안양유원지 계곡 으로 추정된다...(당시 안양유원지는 여름 해수욕장을 대신할 유명한 피서지였으므로)


유원지 입구에서 판매하는 목각인형을 촬영한 것일게다.


아이스께끼통을 메고 있는 소년에게 카메라앵글을 맞추는 이방인을  아이들은 더욱신기해 하지 않았을까?


선캡과 밀집모자가 많이 걸려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데 당시 유원지 앞의 상점 모습을 촬영한 사진같다.

(요즘은 시골에서도 보기드문 모습이지만 그시절 모든 구멍가게가 이와같은 모습이었다.)



버스종점 풍경...


도로가 포장되기전의 버스 종점이 있던 마을 사진일거다..


간판의 "안양영업소"란 글씨로 보아 안양역 근방의 번화가를 촬영한것 같다.



땡볕이 내리쬐는 여름 한낮의 한적한 도로 풍경..(냉차장수의 파라솔과 두루마기 차림의 노인의 뒷모습이

아련한 추억속의 정겨운 풍경이다.)


주변의 간판에 영문이 많이 보이는것과 미군으로 보이는 이방인들이 많이 보이는것이 미군부대근방의 기지촌 마을 같다.


전형적인 변두리 농촌도시의 모습을 나타내는 사진...(사진뒷편의 건출물은 관공서내지 학교 건물로 보이는데

이시절 서울 변두리의 모습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기지촌 주변의  번역사무소모습...(양자수속이라는 말이 혼혈아들의 슬픔을 말해주는것 같고, 왼편의 "막걸리 쎈타"라는 간판이

우습지만 이당시에부터 한동안 "쎈타"라는말이 대 유행을 했다.)

최근 금의환향하며 한국을 방문한하인즈 워드가 우리에게 자성의 기회를 갖게 했다는

어느 외신의  기사가 가슴에 와 닫는것은  배타적 민족주의와 순혈주의 및 잘못된 선민사상으로

6.25 동란이후 탄생한 혼혈아들의 고통을 이루 말로 표현 할 수가 없었다.